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홍콩의 밤을 담은 중경상림 도시감성, 카메라워크, 거리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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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밤을 담은 중경상림 도시감성, 카메라워크, 거리풍경

by richsj87 2025. 6. 11.

영화 ‘중경상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은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이자, 1990년대 홍콩이라는 도시가 지닌 정체성과 정서를 시적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고속화되는 도시의 리듬 속에서 느껴지는 고독, 복잡한 로케이션 속의 감정, 그리고 매 장면마다 담긴 상징적인 공간들은 영화 그 자체가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러브레터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이 글에서는 ‘중경상림’ 속 홍콩이라는 도시의 의미와 그 상징적 역할을 깊이 있게 해석해봅니다.

 

영화 중경상림 사진

홍콩의 밀도와 고독: 도시 속에서 길 잃은 사람들

‘중경상림’은 도시의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들을 통해, 1990년대 홍콩이라는 공간이 품은 정서를 그려냅니다. 좁고 복잡한 골목길,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중경빌딩(重慶大廈),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들은 화려하면서도 고립된 공간입니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혼자이며,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대신 내면의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전합니다. 이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전달되지 않는 진심, 혹은 전달될 수 없는 감정을 상징합니다. 경찰 223번은 캔 통조림의 유통기한에 감정을 이입하고, 페이는 몰래 남의 집을 청소하며 관심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모두 도시 속에서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으며, 홍콩이라는 밀집된 도시 공간은 그러한 심리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왕가위 감독은 이러한 고독을 ‘물리적 거리’가 아닌 ‘정서적 거리’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지만, 마음은 서로 멀어져 있고, 그 틈새는 건물 사이의 골목처럼 깊고도 좁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도시의 속도와 크기보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고립과 침묵을 통해 홍콩이라는 도시의 본질을 묘사합니다.

로케이션의 의미: 중경대하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화의 배경이 되는 중경대하(重慶大廈, Chungking Mansions)는 실제로 홍콩 침사추이에 있는 건물로,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영화 초반부에서 마약 밀매와 사랑의 추적이 벌어지는 중심지로 등장합니다. 좁고 어두운 복도, 상점들과 낡은 간판들, 그리고 낯선 이국인들이 스쳐가는 모습은 홍콩의 국제성과 동시에 혼란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반면 영화 후반부에서는 홍콩 섬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s Escalator)가 주요 공간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실외 에스컬레이터로, 도시와 도시, 고지대와 저지대를 연결하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페이가 햄버거 가게를 지나, 음악을 들으며 느릿하게 이동하는 장면은 도시의 빠른 속도에 저항하려는 개인의 의지를 암시합니다.

이 두 공간은 홍콩이라는 도시의 이중성—‘혼란과 질서’, ‘속도와 멈춤’, ‘이방성과 일상성’—을 각각 대표하며, 왕가위는 이를 통해 도시 그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가 되도록 연출합니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상징성: 정체성과 변화의 메타포

‘중경상림’이 제작된 1994년은 중국 반환(1997)을 3년 앞둔 시기로, 홍콩 사회 전체에 정체성과 불안, 향수의 감정이 흐르던 시기였습니다. 영화는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 전체가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은유적으로 전달합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으며, 공간은 고정되지 않습니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과거를 붙잡으려 하며, 결국은 이별과 반복 속에 자신을 놓습니다. 이는 당시 홍콩 사회가 경험하던 ‘정체성의 유예’ 상태와 정확히 겹쳐집니다.

왕가위 감독은 홍콩이라는 도시를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결코 진짜 도착하지 않는 곳’으로 그려냅니다. 중경상림의 인물들이 특정한 목적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걷는 장면은 바로 그 도시적 정서—방향 없는 속도감과 향수를 대변합니다.

결국 ‘중경상림’ 속 홍콩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적 맥락과 감정적 풍경을 모두 아우르는 영화적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러한 복합적인 도시를 가장 시적으로, 그리고 가장 고독하게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경상림’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입니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리듬,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 그리고 상징적인 공간들은 영화의 정서를 더욱 농밀하게 만들어줍니다. 도시 속 고립과 연결, 감정과 거리 사이에서 당신 역시 이 영화 속 인물들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 중경상림을 다시 감상해보세요. 그리고 그 속의 홍콩을, 고독을, 그리고 사랑을 느껴보세요.